
친구의 요청으로 양은 주전자에 전기요까지 챙기느라 짐이 정말 많았는데, 캐리어를 닫을 때부터 뭔가 불안하다 싶더니 결국 지퍼가 터졌다. 택시 기사님이 가방을 들어 올리자마자 그야말로 흥부의 박처럼 쩍 하고 갈라져 버렸다. 그 가방은 2018년에 테서렉트 안의 허지혜가 골라준 것이다. 배웅 나온 엄마와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와..." 하고 탄식하며 가방에서 굴러 나온 짐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끈 같은 것이라도 가져와 보라는 기사님의 다그침에 얼음땡이 되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투명 박스 테이프와 요상한 보자기를 서너 개 가지고 나왔는데 그 와중에도 그 보자기가 우스워서 "엄마, 이건 도대체 뭐야?" 하고 웃었다. 기사님이 전투적인 기세로 테이프를 두르기 시작했다. 마치 이 가방을 영원히 봉인하려는 것처럼. 목적지까지는 집에서 고작 3분 거리였는데 내가 보상금이라도 요구한다면 그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될 테니 서둘러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25kg 가까이 되는 짐이 들어간 캐리어를 투명 테이프로 고정하겠다는 그의 기지(?)는 내 눈에 너무나도 터무니없어 보였다. 더 나은 꾀를 내어 그의 봉인을 막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이보다 더 현실적인 대안은 없었다.
"이게... 될까요...?"
"어이구,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절대 안 터져요.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아... 저 해외로 가는 거예요. 비행기 타야 하는데... 하하하..."
출국일이 다가오면 몇 날 며칠 악몽을 꾼다. 각종 불안 요소가 감칠맛 나게 어우러진 아주 쫀득한 꿈이다. 올해는 면도날을 손에 쥔 살인범의 협박을 받는 등 끔찍한 정도가 작년보다 더했는데 현실의 미션들 역시 만만치 않게 사나웠던지라 내게 별다른 타격을 주진 못했다. 그런 와중 캐리어 사건은 짧고 강렬한 일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게 '됐다'. 됐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캐리어 사건은 우주의 재기 넘치는 장난, 조화롭고 세련된 액땜에 지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테서렉트 속 허지혜가 골라준 장밋빛 캐리어와 여전히 함께다. 우리는 여행 프로그램도 여행 유튜버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우아한 델리의 한여름을 며칠간 맘껏 즐기고, 마침내 라다크 땅을 함께 밟았다. 아침마다 누리는 고요와 평온이 온갖 자극으로 닳고 거칠어진 나의 구석구석을 다시 채우고 부드럽게 손질한다.
고요와 평온이라는 선물과는 별개로 이곳에서도 새로운 미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달라진 상황들, 통제할 수 없는 일들, 익숙함과는 거리가 먼 것들, 온통 내게는 도전을 요구하는 일들이다. 호불호를 따지자면 불호에 가까운. 내가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듯 보일지도 모르겠는데 사실은 반대다. 피할 수 없으니 매번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코드인간. 치열한 겨울과 봄을 보내며 얻은 교훈이 하나 있는데, 인간의 모든 순간은 피할 수 없으니 마주한 현실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이 세계가 완전한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가끔 망각할 때야 비로소 즐거움이나 행복한 기분, 슬픔과 외로움 따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삶의 내용은 그게 전부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주 어렴풋이 자유의 모양을 엿보았다. 그럼에도 계속 의미와 진리를 찾으려는 바보짓을 일삼겠지만, 불리할 때마다 신을 그리워하며 무릎 꿇고 기도하겠지만, 나는 여름의 신이다. 라다크에서의 여름을 시작하며 다시 구호를 외쳐본다.
희망도 체념도 치워두자. 속임수를 쓰지 말자.